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신창원 인권논란
    카테고리 없음 2020. 2. 20. 15:12

    신창원 인권논란 독방 CCTV 감시 사생활 침해

    희대의 탈옥수라 불리우는 신창원이 국가인권위원회에 20년간의 독방생활과 CCTV 감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진정을 넣은 결과 인용 결정을 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신창원을 수감 중인 광주교도소장에게 독방 생활과 CCTV 감시에 대해 재검토하라고 권고 했으며 법무부 장관에게도 이와 관련해 교도소 수용자를 감시 관리하는 합리적 기준을 마련하라고 요청했다.

     


    국가인권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신창원은 1999년부터 재수감되며 독방에 수용되어 CCTV로 일상을 감시받았다. 신창원은 1990년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지만 수감중인 1997년 교도소 화장실을 끊고 탈옥한 뒤 2년만에 다시 잡힌 바 있다.

    신창원은 1967년 5월 28일생으로 올해 52세이다. 174cm의 키에 67kg의 몸무게를 가지고 있다. 

    신창원 인권논란

     


    신창원은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하신리에서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신창원에게는 지독한 가난도 고통이었지만, 어머니가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그를 사랑해주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엇나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을 속였다는 이유로 신창원을 때렸고, 나중에는 계모까지 들어왔다. 계모는 신창원의 동생이 아픈데도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학교 생활에도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신창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출을 시작했고, 결국 중학교에 진학한 지 3달 만에 퇴학당했다.

     


    신창원이 범죄자가 된 계기는 그의 저서에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는 막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악마가 태어났음을 느끼고 어둠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21세기에 인권존중을 그나마 어느정도는 받으며 초중등 교육을 마친 세대들이 보기에는 "세상에 그딴 막돼먹은 몹쓸 쓰레기 같은 교사들이 어딨냐?"라며 믿지 못하고 그냥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만 해도 만화 검정 고무신이나 소설 흰종이 수염에 나오는 것처럼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도 없는 이러한 잡다한 납입금을 안 냈다는 이유로 교장이나 교감 같은 높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엄하게 가르쳐야 강하게 자란다는 핑계나 다름없는 명분을 내세워 담임들에게 돈을 안 가지고 온 아이들을 때리라고 지시하거나 담임들이 교실 앞에 불러세워 놓고,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안 내면 졸업 못한다' 식으로 으름장을 놓은 온건한 타입부터 두들겨 패고 모욕감을 주거나 심지어 수업받을 자격이 없다며 교실에서 내쫓는 썩어빠진 부패한 교사들이 분명히 있었고 심지어 많았다. 인권의식 및 시민의식이 낮았던 당시 시대 분위기도 한 몫 했다.

     


    이런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신창원이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만들었으며,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남의 밭과 가게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고 동네에서 닭, 수박 서리를 하기 시작한 게 도둑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는 달리기가 빨라 도망치면 아무도 못 잡았다고 동네 사람들이 전한다. 또한 무작정 멀리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서 추적자의 동향을 살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신창원의 경찰서에 끌려간 것이 14살 때였다. 어느 날 좀도둑질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이때까지는 신창원을 범죄자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창원의 아버지는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답시고, 경찰관들도 훈방 조치한 신창원을 굳이 다시 끌고 와서 소년원에 넣어달라고 사정을 하여 잡아넣었다. 아버지의 의도는 정말 좋은 뜻이었는지 어떤지 몰라도, 이 때문에 신창원의 인생은 망가졌다. 소년원을 다녀온 일을 계기로 감옥에 한 번씩 갔다 올 때마다 그의 범죄는 나날이 대담해졌으며, 결국에는 강력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신창원은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 했다.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했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권투를 배워 그는 걸핏하면 남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합의금으로 줄 돈이 없어 후배들과 함께 돈 좀 있어 보이는 행인을 협박해 돈을 털기도 했다.

     


    이후 서울에서 신창원은 고향 선후배 4명과 모의해 슈퍼마켓과 금은방 등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다 1989년 3월 28일에 주범인 김양훈이 문구점을 운영하는 피해자를 살해하게 된다. 다른 일당 4명은 4월 1일에 체포됐지만, 신창원은 총상을 입고 도주에 성공했고 반 년 뒤에 체포되었다.

    이후 신창원은 강도살인치사죄로 무기징역을 받고, 이미 전과가 너무 많았기에 청송제2교도소에서 복역한다.

     


    신창원은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다 1997년 1월 탈옥을 저질렀다. 노역 작업 도중 손에 넣은 작은 실톱날 조각으로 하루 20분씩 무려 4개월간 화장실 쇠창살을 몰래 조금씩 그어 마침내 지름 1.5cm의 쇠창살 2개를 끊었고, 감방을 빠져나와서 외벽 환기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끊은 쇠창살로 20m 가량 떨어진 교도소 내 교회 신축공사장 철담장 밑의 언 땅을 폭 53cm 깊이 20cm 가량 파내어 공사장으로 들어간 후, 공사장에서 주운 밧줄을 타고 외부로 통하는 공사장 펜스를 넘어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신창원이 빠져나가는 데에는 1시간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사전에 동료 죄수들을 포섭했다거나 심지어 교도소의 묵인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설이 제기될 정도로 신출귀몰한 탈출이었다. 이 탈옥을 위해 좁은 곳을 지나가기 쉽도록 15kg을 감량하였고, 신뢰를 쌓아 감시를 줄이기 위해 오랜기간 모범수로 지냈다고 한다. 교도소를 빠져 나간 신창원은 500m 떨어진 화훼 농가로 침입하여 옷을 훔쳐 입고 자전거를 훔쳐 4km를 달려 구포사거리까지 간 뒤, 택시를 타고 서울로 잠입했다.

     


    신창원은 그 뒤 2년 6개월간 4만여km 의 거리의 도주를 계속하였으며, 도주를 다니는 동안 빈집들을 털며 훔친 현금으로 생활하였고 이동 수단도 훔친 차를 이용하였다. 그렇게 도망 다니는 동안 잡힐 듯 하면서도 체포 직전에 경찰의 추격을 따돌린 것만 무려 6번이었다. 연 인원 97만 여명이 동원되었고, 전국 6개 지역 지방 경찰청에 수사 본부가 설치되는 등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주 행각을 벌였다. 그 중 유독 천안시 근처에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천안 시내 이곳저곳 마다 경찰 병력이 배치되고 차량 검문이 실시되었으며 천안 시민들이 공포에 떨어야 했다. 

     


    실제로 천안 이외에도 지나간 곳이 많아 곳곳마다 해당 지역 경찰서 높으신 분들의 목이 날아갔다. 당시 신창원 검거 실패로 징계 받은 경찰은 29명, 총경 이상만 10명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복무하던 전의경과 경교대원들에게도 악몽으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진급 정체를 해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또한 이 때 진급한 김석기 등이 나중에 서울지방경찰청장까지 승진하게 된다.

     


    이리하여 신창원은 방송을 타며 전국구 급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현상금이 1000만원에서 5000만원이 넘어갔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사상 최고액 현상금으로, 2011년까지 매 년마다 산불을 일으킨 방화범 일명 '봉대산 불다람쥐'에 현상금 3억원이 걸릴 때까지 경신 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유병언이 현상금 5억원으로 기록을 다시 깬다.

     


    1999년 당시 5000만원은 단순 소비자물가지수 가치환산으로도 2018년 기준 약 8천만원이며, 최저임금으로 산정해보면 1999년 최저임금은 시급 1,600원이므로 시급 7,530원인 2018년에는 약 2억 3500만원으로 엄청나게 큰 현상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창원의 현상금 때문에 별의 별 천태만상들이 나왔는데, 신창원이 나타난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도 저 혼자 공 세우려고 단독으로 검거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징계를 받은 형사가 있는가 하면, 잠복근무를 하던 형사가 신창원 동거녀를 성폭행하여 결국 파면 되고 구속되지 않나, 신창원 관련한 신고를 받고 천신만고 끝에 검거했는데 알고 보니 신창원을 사칭한 강도범인 경우도 있었다. 가장 압권은 시민의 신고로 검거된 상태에서 경찰의 부주의로 놓친 일이 있었는데, 이걸 가지고 현상금 못 주겠다고 경찰 측에서 땡깡을 부려, 신고자가 소송을 내고 대법원까지 끌고 가면서 5000만원을 다 받아냈다. 이리하여 신창원 현상금은 두 번 지급되었다.

     


    거기에 신창원은 경찰의 발터 PP에 맞았는데도 기어코 도망을 가고, 격투 중 부러진 뼈를 혼자 맞추기도 했다. 추격이 심할 땐 쥐를 잡아먹으면서 박스 안에서 일주일 넘게 은신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능력이다.

    여담이지만 신창원은 문신이 있다. 아무리 별의 별 변장을 해도 문신을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문신을 가리기 위해 한여름에도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자주 활보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데 쓰인다.

     


    신창원 곁에는 늘 여자가 있었다. 검거당시 신창원은 전북 익산시 은하수카페 종업원 김모 양과 동거하며 결혼을 약속했다. 6월 29일 김 양은 순천에 내려가 대주파크빌을 계약하고 다음날부터 곧장 살림을 시작했다. 신창원은 이 때 김 양에게 돈다발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나를 배신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등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7월 16일 신창원이 검거되자, 김 양은 이러한 사정을 털어놓으며 "아파트는 내 이름으로 계약했으니 빼앗지 말아달라."라고 경찰에 사정했다. 김 양에게 중요한 것은 신창원과의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던 것이다. 결국, 신창원은 자신을 숨겨줄 여자가 필요했고 여자는 돈이 필요해서 이해관계가 떨어진 것이 '신창원의 여복'이었던 셈이다. 물론 신창원도 여자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피처로 이용했던 것이기에 서로 각자의 이익을 위한 필요관계에 불과했던 것.

     


    신창원의 검거는 1999년 7월 16일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대주파크빌 104동 205호에서 가스레인지 수리공이었던 신고자 김영근 씨는 당시 우연히 의뢰 받은 집을 수리하다가 신창원을 보았는데, 신창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으며, 경찰에 신고 후 심지어 부동산에 들어가서 그 집이 여자의 명의로 된 건지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집을 계약한 다음날 바로 입주했다는 것을 알고 신창원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대개 이사하려면 계약하고 며칠 뒤 돈을 주고 들어오는 게 보통이기 때문.

     


    김영근 씨는 자기가 군 생활을 국군정보사령부 특작부대에서 해서 남다른 눈썰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밝혔다. 김영근 씨는 이 공로로, 자신의 오랜 꿈이었으나 매번 떨어졌던 경찰이 되었다고 한다.그가 검거될 당시 입었던 nbsp;미쏘니 니트 셔츠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 저 딱 달라붙는 티셔츠가 '신창원 티셔츠'라며 유행하기도 했다. 검거된 뒤 징역 22년 6개월이 추가되었고 그는 흉악범을 가둬두는 청송교도소의 2.6m2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이상 신창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